독립열사 유관순, 그 짧고도 강인했던 생애

8월 15일 은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무래도 해외에 살고 있는 교민들은 한국과 멀리 떨어져 살다보니 광복절에 대한 의미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죽어간 수많은 열사들에 대해 접하는 시간이 많이 줄어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번 광복절을 맞아 그 수많은 열사들 중에서도 꽃다운 18세의 나이로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다 죽어간 유관순 열사에 대해 돌이켜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관순은 1902년 현재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류중권의 3남 1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실한 기독교인임과 동시에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학교를 세워 민족의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계몽운동가였다.

이같은 집안의 배경을 바탕으로 유관순 역시 일찍부터 기독교 감리교 신자로서 신앙심을 키워갔고 이미 1910년 빼앗겨 버린 나라에 대한 아픔을 간직하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애국정신을 키워 갔다. 그러던 중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5년 봄 이화학당에 편입하게 된다. 나이 13살. 프라이 교장의 보살핌 속에서 선진학문을 배우며, 먼저 입학한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선후배들과 어울리며 여느 또래 아이들과 같이 성장하는 듯해 보였지만 이 행복한 학교생활 속에서도 조국과 민족에 대한 고뇌와 사랑은 계속되었는데, “나는 잔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며 기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고종황제가 일본에 독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한 유관순은 마침 민족 지도자들이 대규모로 준비하던 3.1운동에 대한 소식을 듣게되고 이에 참가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민족자결주의 원칙’ 때문이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천명한 것으로,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우리 국민들은 이 기회에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독립운동을 계획하게 되고 중국 상해의 신한청년당과 일본 동경의 조선유학생향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었고, 국내에서는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된 사회단체들 대신 종교계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독립운동이 추진되었다. 천도교와 기독교, 그리고 각 학교에서 따로 추진되었던 독립운동 계획은 천도교 측의 연합 제안으로, 교단과 종파를 초월하여 민족대연합전선으로 구축하게 되었고 이 연합을 통해 민족대표가 선정되고 거사일과 역할 분담 등이 결정되었습니다. 또 후에 불교계와 다른 학생들까지도 동참하면서 독립운동 계획은 더욱 탄탄한 진행되었다. 일본 동경의 조선유학생향우회의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서’를 통해 일제침략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한일병합이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규탄하였다. 또한 식민지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며,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지요. 2·8독립선언은 일본의 저지로 실패했지만, 3·1운동 계획을 본격화 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3·1독립선언서는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어 민족대표들의 긴 협의를 거친 끝에 완성되었다. 그 후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2만 1천여 매를 몰래 인쇄하며 3·1운동을 준비하게 된다.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집결한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이후 2시 30분경,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수 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은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간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이 같은 3·1운동의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 조직인 이문회를 통해 알고 있던 유관순 선생은, 3·1운동 발발 바로 전날 학당 내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맹세하였고 3월 1일, 만류하는 선생님을 뒤로한 채 학교의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한다. 그날 이후 3월 5일 서울에서 전개된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면서 항일 독립의지를 다졌다.

이 같이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시위의 추진 기지가 되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임시휴교령을 내렸고 학교가 문을 닫자 유관순 선생은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한뒤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고 계획을 밟아 나갔다.

고향 유지들과 함께 4월 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천안뿐만 아니라 안성, 진천, 청주, 연기, 목천 등에도 연락기관을 두어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갔다. 드디어 4월 1일, 선생은 장터에서 밤새 직접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정오가 되자 군중 앞에서 열변을 토해내며 독립운동의 투지를 불태웠다. 18세 어린 여학생의 뜨거운 연설은 모인 군중들의 애국심과 울분을 한껏 끌어올렸고, 이어진 독립선언식을 마친 후 유관순 선생을 필두로 한 3천 여 명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일본 군인들이 몰려들어와 총검으로 시위 참여자들을 학살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유관순 선생의 아버지인 유중권 선생은 이런 학살에 대항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했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 달려든 선생의 모친인 이소제 선생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관순 선생은 부친의 시신을 둘러메고 만세운동 주도자들과 함께 군중들을 이끄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막대한 병력을 투입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며 시위 참가자들을 해산시킨 뒤, 그 날 저녁 유관순 선생과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하였다. 유관순 선생은 이곳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며,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며 공주 감옥으로 이송될 때 지켜보는 군중들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연이어 외치며 독립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선생은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소리치며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을 보였다. 그러나 결국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아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면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그곳에서 더 심한 강도의 고문을 받게 된다.

선생이 받았던 고문은 현재까지도 가장 악랄하게 치부되는 일제의 고문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그 모습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기록된 고문 내용만 해도 펜치로 손발톱을 강제로 뽑고, 위에 호스를 연결시켜 뜨거운 물과 칼날 등을 집어넣고, 그림에 보이는 것 같이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나무 상자에 긴 대못을 박아놓고 3일간 가둬놓는 등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강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우리 유관순 열사는 민족적인 기개를 잃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6월 30일 경성 복심법원에서도 징역 3년을 받게 되어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에도 유관순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고,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의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1920년 9월 28일, 결국 유관순 선생은 차마 입에 담을수 수도 없는 잔인한 고문으로 인해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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